노고단 올라가는 길
지리산에 올라가 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지리산 하면 가장 먼저 천왕봉을 떠올렸습니다. 지리산의 최고봉이자 우리나라 산악인들에게는 하나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지리산을 걸어보니 꼭 천왕봉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지리산의 진짜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노고단이었습니다.
제가 노고단에 올랐던 날은 성삼재에서 출발했습니다. 성삼재까지는 차량으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는 것과 비교하면 훨씬 부담이 적습니다. 성삼재에서 노고단대피소를 지나 노고단 고개까지 걷는 길은 비교적 완만해서 산행 초보자도 도전해볼 만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재미있는(?) 절차가 하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탐방 예약입니다.
예전에는 노고단에 올라가는 것이 지금보다 자유로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현재는 다릅니다.
국립공원공단은 노고단의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노고단 고개에서 노고단 정상까지 약 500m 구간을 탐방예약제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국립공원공단 예약시스템에는 이 구간의 하루 예약 정원을 1,870명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운영시간은 오전 5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고 입장 마감은 오후 4시입니다. 인터넷 예약뿐 아니라 현장 접수와 자동전화예약도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성삼재까지 차를 타고 가서 힘들게 노고단 고개까지 올라갔는데, 정작 정상에 올라가려고 보니 예약을 하지 않았다면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정확히 말하면 노고단 전체를 예약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약이 필요한 곳은 노고단 고개에서 정상부로 올라가는 구간입니다. 노고단 고개까지는 예약 없이 갈 수 있습니다.
저는 미리 예약을 하고 갔기 때문에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QR 확인을 거쳐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사람을 제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노고단은 한때 탐방객이 몰리면서 정상부의 식생이 심하게 훼손됐던 곳입니다. 그래서 생태복원을 시작했고, 탐방예약제를 통해 사람의 발길을 조절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노고단은 1990년대부터 생태복원이 진행됐고, 2001년부터 탐방예약제가 도입됐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불편하더라도 예약제가 필요한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노고단 정상의 높이는 해발 1,507m입니다.
1,500m가 넘는다고 하면 상당히 높은 산처럼 느껴지지만 성삼재가 이미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성삼재에서 출발하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노고단 고개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길은 데크로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지막 500m가 가장 설렜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변의 나무와 숲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시야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정상부에 올라서는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보고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습니다.
“역시 지리산이구나!”
이 말이 정말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산 하나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눈앞에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이어지고, 멀리 능선이 물결처럼 펼쳐졌습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지리산의 주요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특히 반야봉과 천왕봉이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지리산 주능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촛대봉, 제석봉, 중봉 등 웅장한 봉우리들이 이어집니다. 노고단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능선은 마치 거대한 파도가 굳어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 산행 기록에서도 노고단 일대에서 반야봉과 천왕봉, 촛대봉 등을 조망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진으로 보면 “산이 많네” 정도인데 직접 보면 느낌이 완전히 다릅니다.
저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단순한 산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능선과 골짜기가 이어져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리산을 ‘산’이라고만 부르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고단을 걷다가 저는 나무들을 유심히 바라봤습니다.
특히 눈에 들어온 것이 구상나무였습니다.
구상나무는 우리나라가 자랑할 만한 고유종입니다. 우리나라 남부의 높은 산에서 자생하는 나무로, 세계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나무입니다. 흔히 크리스마스트리로 사용하는 전나무 계열의 나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자랑스러운 우리 나무가 지리산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구상나무가 고사한 모습은 생각보다 충격적입니다. 푸른 잎을 가진 나무 사이에 하얗게 말라버린 고사목이 서 있는 모습을 보면 처음에는 단순히 오래된 나무가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는 기후변화라는 훨씬 큰 문제가 있습니다.
환경부 자료에서도 지리산 반야봉 일대 구상나무 고사의 주요 원인으로 기후변화를 지목하고 있습니다. 과거 조사에서는 반야봉 일대 약 1㎢에 1만5,000여 그루의 구상나무가 있었는데, 그중 약 45%인 6,700여 그루가 고사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했습니다.
산에 올라 아름다운 풍경을 보다가 죽어가는 구상나무를 마주하니 마음이 묘했습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감탄하는 지리산의 풍경도 사실은 영원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고단 돌탑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노고단 정상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돌탑입니다.
그냥 누군가 돌을 하나씩 올려놓아 만든 돌탑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노고단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노고단은 이름부터 특별합니다.
‘노고’는 늙은 할머니를 뜻하는 말로, 지리산의 산신으로 여겨지는 노고할머니 또는 마고할머니와 관련된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로부터 이곳은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장소였다고 전해집니다.
전해지는 이야기 가운데에는 신라시대 화랑들이 이곳에서 수련하면서 탑과 단을 쌓고 천지신명과 노고할머니에게 나라의 번영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옛 흔적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오늘날의 돌탑은 1961년에 다시 축조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고단의 돌탑은 단순한 돌무더기가 아니라 이 산에 쌓여온 사람들의 신앙과 염원, 그리고 오랜 역사를 상징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탑 앞에 서서 주변의 산을 바라보니 괜히 숙연해지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노고단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반달가슴곰입니다.
지리산에는 반달가슴곰이 실제로 서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정확하게 알고 가야 합니다.
흔히 “지리산에 반달곰을 풀어놨다”고 이야기하지만, 정확하게는 정부가 2004년부터 멸종위기종인 반달가슴곰을 지리산에 복원하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개체를 방사해온 것입니다.
따라서 지리산은 이제 단순히 등산객만 다니는 산이 아닙니다.
야생동물이 실제로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물론 노고단 정상에서 갑자기 반달가슴곰이 나타날 가능성을 걱정하면서 산행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리산을 걷는다면 야생동물을 만날 가능성이 있는 산이라는 사실 자체는 기억해야 합니다.
먹이를 주거나 가까이 다가가는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하고, 혼자 무리하게 샛길로 들어가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특히 지리산은 워낙 넓기 때문에 “사람이 다니는 산”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산길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도 괜히 주변을 한 번 더 살펴보게 되더군요.
“혹시 곰 아니야?”
물론 대부분은 새소리나 바람 소리였겠지만요.
정상에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내려올 시간이 되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봤습니다.
방금 제가 서 있었던 노고단 정상이 보이고, 그 뒤로 반야봉과 멀리 이어지는 지리산 능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천왕봉은 저 멀리 있었지만 존재감만큼은 대단했습니다. 중봉과 촛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역시 웅장했습니다.
그 순간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산을 전부 걸어보고 싶다.”
하지만 지리산은 그렇게 쉽게 허락해주는 산이 아니겠지요.
노고단 하나만 올랐는데도 지리산의 규모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내려오면서 또 하나 느낀 것이 있습니다.
노고단 정상에 올라가는 길을 일부러 제한하고 하루 탐방객을 1,870명으로 제한하는 것이 단순히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기 위한 규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너무 많이 몰리면 우리가 보고 싶은 바로 그 아름다운 풍경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상나무가 죽어가고 있고, 야생동물이 살아가고 있으며, 고산지대의 식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민감합니다.
그러니 노고단의 예약제는 어쩌면 지리산을 오래 보기 위한 약속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1,870명이 조금 불편하게 올라가는 대신, 미래의 수많은 사람들이 노고단의 풍경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렇게 생각하니 예약을 해야 한다는 것이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상에 올라서서 바라본 지리산의 능선이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반야봉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고, 촛대봉과 중봉이 겹겹이 펼쳐지는 그 풍경.
그 앞에 서면 누구라도 한마디쯤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역시 지리산이구나.”
제가 노고단에서 가장 오래 기억하고 있는 순간도 바로 그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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