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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 다산초당에 가보니

전남 강진 다산초당 방문기

정약용은 이 산속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전남 강진에 가면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 다산초당이었습니다.
정약용.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이름입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고,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를 비롯해 수많은 책을 남긴 사람입니다.
그런데 책에서 읽었던 정약용과 직접 다산초당에 올라가서 생각해본 정약용은 조금 달랐습니다.
그곳에 직접 가보니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의외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참 외로웠겠다.”
다산초당은 생각보다 깊숙한 산속에 있었습니다.


1801년, 정약용은 조정에서 밀려났습니다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를 온 것은 1801년입니다.
당시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관직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수원화성 축성에 참여하고 거중기 등을 활용하는 등 능력을 인정받았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천주교와 서학에 관련된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탄압을 받았습니다. 정약용 역시 서학과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체포됐고, 처음에는 경상도 장기로 유배됐습니다.
그런데 그해 황사영 백서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상황이 꼬였습니다.
정약용은 다시 붙잡혔고 결국 강진으로 유배지가 옮겨졌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강진 유배가 무려 18년이었습니다.
1801년에 강진에 내려와 1818년에야 풀려났습니다. 마흔 살에 유배를 와서 쉰일곱 살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긴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여행을 가서 일주일만 집을 떠나 있어도 집 생각이 나는데, 정약용은 무려 18년을 타향에서 보냈습니다.
그것도 여행이 아니라 유배였습니다.
돌아가고 싶다고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족을 만나고 싶다고 마음대로 만날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처음부터 다산초당에서 산 것도 아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정약용이 강진에 왔다고 해서 처음부터 이 산속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강진읍성 동문 밖 주막에 있는 작은 방에 머물렀고, 이후 여러 곳을 옮겨 다녔습니다.
그러다 1808년 봄, 지금의 다산초당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1818년 해배될 때까지 10여 년을 보냈습니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길을 직접 걸어보니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산길이었습니다.
지금은 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서 올라가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그래도 ‘여기에 집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숲속이었습니다.
요즘이야 이런 곳을 찾아가면 힐링 여행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200년 전에는 이야기가 달랐을 것입니다.
전기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밤이 되면 주변은 캄캄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유배객 신분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다산초당에 올라가 보니 정말 집 한 채가 전부였습니다

드디어 다산초당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첫 느낌은 솔직히 조금 허무했습니다.
‘이게 다인가?’
산속에 집 한 채가 덩그러니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의 건물이 정약용이 살던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한 것은 아닙니다.
원래 초당은 세월이 지나면서 무너졌고,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가 옛 터에 건물을 복건했습니다. 이후 보수공사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보는 건물은 정약용이 살았던 원래 초가집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주변 풍경이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집이 복원된 것이지 산과 숲까지 새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니까요.
나무 사이에 있는 작은 공간이었습니다.
여기서 정약용이 10년 넘게 살았습니다.


다조, 연지석가산, 약천 그리고 정석

초당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습니다.
다조도 보였습니다.
차를 끓이던 돌입니다.
약천도 있었습니다.
정약용이 이 물을 떠다 차를 끓여 마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지석가산도 보였습니다.
연못을 만들고 그 안에 작은 돌산을 꾸며 놓은 공간입니다.
초당 뒤쪽에는 정약용이 직접 ‘丁石’이라는 글자를 새겼다고 전해지는 바위도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씩 보고 있으면 ‘아, 정말 사람이 여기서 생활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적 하나하나보다 더 마음에 남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주변의 적막함이었습니다.
정약용이 이곳에서 차를 끓이고 책을 읽고 제자들과 토론했을 모습을 상상해봤습니다.
낮에는 그래도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찾아오고 학문을 논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밤은 달랐을 것입니다.
어두운 산속.
멀리 떨어진 가족.
끝이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유배생활.
그때 정약용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얼마나 외로웠을까”

저는 다산초당에 와서 이 생각을 가장 많이 했습니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정약용은 원래 혼자 공부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조정에서 사람들과 만나고 정책을 논하고 나라의 일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정치적인 격변 속에서 한순간에 중앙에서 밀려나 머나먼 강진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산속까지 들어왔습니다.
물론 다산초당에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정약용은 강진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다산초당에서도 학문 연구와 교육을 이어갔습니다.
18명의 제자가 이른바 ‘다산학단’을 이루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니 완전히 혼자였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외롭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자가 있다고 해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적으로 다시 쓰일 수 있을지, 언제 유배에서 풀려날지 알 수 없는 시간도 계속됐습니다.
실제로 해배 명령이 나왔다가도 반대 때문에 풀려나지 못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결국 1818년에야 강진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외로움이 공부를 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제가 정약용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산속에 갇혀 있고, 할 일도 별로 없고, 마음은 답답하고, 가족도 보고 싶고….
아마 처음에는 하루 종일 괴로워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결국 책을 잡았을 것 같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요즘도 중요한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일부러 산속이나 조용한 곳을 찾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학입시든 고시든 자격시험이든 결국 주변에 아무것도 없으면 공부에 집중하게 됩니다.
다산에게는 그것이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밀려났기 때문에 오히려 세상을 바라볼 시간이 생긴 것입니다.
정약용은 이곳에서 제자들과 경전을 연구하고 토론하며 수많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강진 유배 기간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특히 다산초당 시절에 중요한 저작들이 집중됐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산초당이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외로운 산속의 작은 집이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이 세상과 단절된 채 세상을 다시 공부한 장소였던 것입니다.
백련사로 가는 오솔길이 정말 좋았습니다다산초당에서 그냥 내려오지 않고 백련사 방향으로 걸었습니다.
이 길이 참 좋았습니다.
사람들이 다산초당에 와서 집만 보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이 길을 꼭 걸어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무 사이로 이어지는 오솔길이었습니다.
걷다 보면 마음이 이상하게 편안해집니다.
이 길을 정약용도 걸었을 것입니다.
백련사의 혜장선사와 교류하면서 이 길을 오갔고, 학문과 세상 이야기를 나눴을 것입니다.
저는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약용은 이 길을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집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렸을까요.
가족 생각을 했을까요.
아니면 또 책에 쓸 내용을 생각했을까요.
어쩌면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고 이 길을 걸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평범한 산길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연간 30만 명이 찾는 곳이라고 합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다산초당 유적지는 연간 약 30만 명의 탐방객이 찾는 곳으로 추산된 기록도 있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숫자입니다.
그런데 제가 갔을 때 느낀 다산초당은 그 숫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었습니다.
30만 명이 찾는 관광지라기보다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산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방문한 시간과 계절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다산초당의 매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역사 유적지인데도 막상 안으로 들어가면 조용합니다.
아마 정약용이 살았던 200여 년 전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곳이 다르게 보입니다

젊었을 때라면 다산초당에 와서 ‘정약용이 공부했던 곳이구나’ 하고 사진 몇 장 찍고 내려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자꾸 사람의 인생이 생각납니다.
한때는 잘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정조의 신임을 받았고 나라의 중요한 일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정치적인 격변을 만나 하루아침에 유배객이 됐습니다.
그리고 강진까지 내려왔습니다.
처음에는 주막집 방 한 칸에 머물렀고,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결국 산속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책을 읽고 제자를 가르치고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18년의 유배가 끝났을 때 그는 빈손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백 권의 책을 남겼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다산을 기억하는 이유입니다.


다산초당을 내려오며

다산초당을 내려오면서 뒤를 한 번 돌아봤습니다.
산속에 집 한 채가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참 쓸쓸해 보였던 집입니다.
그런데 내려오면서는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저곳에서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정약용에게 강진 유배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시간이 없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다산의 학문도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밀려났기 때문에 세상을 더 깊이 바라볼 수 있었고,
사람들과 멀어졌기 때문에 책과 더 가까워졌고,
외로웠기 때문에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다산초당에 직접 와서 제가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역사적인 위대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한 인간의 외로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견디며 공부했던 한 사람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산초당은 저에게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 조금 슬픈 곳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산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작은 집 한 채.
그 집을 바라보며 저는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약용 선생님, 정말 많이 외로우셨겠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외로움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날까지 ‘다산 정약용’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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